러시안 룰렛: 회전식 권총에 하나의 총알만 장전하고, 머리에 총을 겨누어 방아쇠를 당기는 목숨을 건 게임.
흔한 드라마에서나 영화에서나 볼 법한 일이었다.
맨 앞으로 장전된 총알 하나와 손에 쥐어진 구닥다리 리볼버. 그 안에는 총 여섯 발의 총알이 들어갈 수 있는 탄창이 있었고 나는 눈을 가려놓은 손수건을 푸르며 이것을 러시안 룰렛이라 명명했다. 물론 빗나가리란 예상은 전혀 하지도 않았고 이건 확률이 아니라 이미 결정된 것이 다르다면 다르겠지만. 처음부터 내 앞에 전해진 말은 하나였다. 이 총알이 로렌의 심장에 박히거나, 아니면 세상이 끝장나는 꼴을 지켜보던가. 나는 오랫동안 총을 든 탓에 저릿한 손목을 주무르며 인사했다.
“안녕, 레이디?”
그 말에 그녀가 고개를 들고 시원시원하게 웃는다. 안녕, 에이미. 오랜만에 본 그녀의 얼굴은 전에 비하면 더 없이 지쳐보였다. 헝클어진 머리를 정돈해주고 싶었으나 나는 말없이 시린 권총만 꽉 쥐었다. 오랜 술래잡기는 그녀도 나도 그리고 그 뒤의 관객들도 퍽 지루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는 영영 다음 차례가 돌아오지 않아도 좋으니 그들이 그녀를 찾을 수 없기를 바랐다.
"쏠 거야?"
그녀는 말하면서도 별로 무섭지 않은 투였다. 내가 쏘지 못하는 걸 자신하는 투였다. 그게 본심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겉으로 보기엔 그랬다.
그 당당함을 나는 사랑했지. 나는 새삼 우리가 삼류 연애 소설의 주인공인 되었음을 깨달았다.
“레이디가 보기엔 내가 이걸 쏠 것 같아?”
“그건 아닌데, 우리 너무 오래 시간을 끌었잖아.”
로렌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안 쏴.”
나는 팔을 떨궜다.
“그래도 돼? 농담 아니지?”
그녀를 따라 나는 약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가지곤 장난 안 쳐.”
전에는 안 그랬지만. 뒷말은 씹어 삼키고, 평소처럼 장난 끼를 담은 채 언제나처럼ㅡ
“레이디, 알아? 나 전에는 말이야, 어떻게 죽어도 상관없었어.”
그런데 말이야, 사랑에 빠지면 사람이 변한다고 했어. 누가 해준 말인지는 기억 안 나는데 그게 모든 사람에게 통용되지는 않더라도 나는 그랬어. 아니, 레이디가 나를 좀 더 좋은 사람으로 남아있고 싶게 만들어.
어느 누구에게도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얘기였다. 생각해보면 할 필요도 없었지만 늘 생각해왔던 얘기다. 어차피 살다 보면 다들 죽는 거고 우리는 남들보다 조금 더 빨리, 그리고 편안함과는 정반대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렇지만 내겐 남겨진 사람도, 오래 살고 싶은 이유도 없으니 이대로 죽어도 괜찮았다. 와중 너는 처음으로 같이 늙어가고 싶은 사람이었다. 내게 조금이라도 평범한 일상을, 너와 같이 있는 미래를 꿈꾸게 했다. 나는 그걸 살아달라는 말로 밖에 표현할 수 없다.
“레이디. 같이 살자.”
그 말엔 죽더라도 같이, 라는 의미도 이미 내포되어있다. 있지, 로렌. 네가 없는 세상은 내게 필요 없어. 너는 내 세상의 전부고, 차라리 이 세계 전부를 적으로 돌릴지라도 나는 네게 모든 걸 맹세한다.
입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여기서 입을 열면 약한 소리를 할 것 같았다.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나는 그리 아픔에 무덤덤한 사람도 아니다.
총을 떨어뜨리자 날카로운 마찰음과 표적을 잃은 총구가 발치에 꼬꾸라졌다. 나는 발을 굴려 총을 저만치 날려버린다. 그러자 그녀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뀐다. 로렌은 마치 그래도 돼? 하고 묻는 것 마냥 바라보았다. 괜찮아. 만약 실제로 그 말을 했더라면 나는 상관없다고 말해줬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