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AU 불편한 꿈
“야, 이리에!”
톡톡 잠을 깨우기 위한 가벼운 몸짓에 그리고 그것과는 별개로 온몸을 뒤흔드는 감각에 잠에서 깬다.
“다음 시간 이동수업이야... 어, 야 아파?”
주변에 다른 애들은 다 갔는지 문을 잠그는 당번과 저만 교실에 덩그러니 남아 있다. 처음에 귀찮은 기색이었던 반 아이는 제 안색을 살피고는 걱정스러운 눈초리로 물어온다. 땀으로 샤워한 건지 푹 절어 있고 머리가 지끈거리는 게 아픈 증세 같기도 했다.
괜찮아, 이번에 무슨 시간이야?
체육. 아프면 쉰다고 말할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됐어. 먼저 가. 열쇠를 건네받고 마지막으로 남은 아이를 보낸다. 야, 정말 괜찮냐? 너 나중에 쓰러지는 거 아니지? 엉. 아무렴 수업 도중에 쓰러지지는 않을걸? 그렇지만 그 말 하면 억지로라도 보건실에 쳐 넣을 기세여서 애써 그 말을 삼켰다.
한 명 보내놓고 정신을 차릴 생각으로 머리를 헝클었다. 아 짜증나. 아픈 건 아니다. 운동 하면서 컨디션 조절도 못하는 멍청이는 아니다. 그냥,
찝찝한 심정으로 체육복에 팔을 꿰었다. 속에 무어라도 얹힌 듯, 불안감이 온 몸을 기어 다닌다.
악몽이라도 꾼 걸까. 기억나지는 않지만 어렴풋이 폭우가 쏟아질 때의 유리창 같은 흐릿함이 맴돈다. 손으로 눈가를 쓸었다. 따끔따끔했다. 거울을 보진 않았지만 틀림없이 눈꼬리가 붉어있지 않을까. 나는 여전히 분필 가루가 덕지덕지 묻어 있는 칠판을 응시하다 반을 나왔다. 반에는 비로소 정적이 찾아왔다.
* * *
요새 봄하고 가을은 아예 사라진 것 같아. 불퉁한 표정으로 말하던 이가 떠올랐다. 기말고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됀 5월의 중간은 4월초 까지도 가시지 않던 추위가 언제 그랬냐는 듯 더위로 무장한다. 운동장 귀퉁이에 있는 수돗가에 머리를 대고 수도꼭지를 틀었다. 차가운 물이 등까지 적셨다.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고개를 들고 운동장을 바라보자 저마다 바쁘게 움직이고 있다. 정 중앙에서는 축구를 하는 애들이 제일 많고 그 다음엔 몸을 낮추고 드리블을 하는 마찰음이 여기까지 들린다. 가끔은 공을 뺐기 위한 몸싸움도 있다. 저거 덥지 않나. 혀를 끌끌 차며 쓱 훑는다. 그리고 운동장 전체로 보면 육상도 있다. 초반에 과감할 정도로 빠르게 달리는 타입도 있는가 하면 차츰차츰 속도를 높여가며 앞에 선 아이를 압박하는 타입의 아이도 한 발 한 발 과감하게 땅을 차고 달린다. 나는 가장 최근에 있을 대회 날짜를 하나 둘 셌다. 어차피 부장이 아닌 이상 제가 신경 쓸 건 거의 없겠지만. 귀찮아 질 법한 일은 싫어서 억지로 거절하기도 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었다. 나는 평범한 부원 1로도 족하다.
“이젠 진짜 여름이네.”
문득 중얼거렸다. 그늘진 곳에 기대 있으니 갑자기 온 몸이 나른해진다. 별 생각이 없어진다는 말이 더 정확할 거다. 눈을 느리게 깜박거렸다. 고개가 꾸벅꾸벅 푹 꺾인다.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다.
“......? 카에데?”
나는 입을 가리고 작게 하품을 했다. 끝났어? 응, 히나타도 부활 끝났어? 어, 방금 막. 나는 수돗가 위에 얹어놓은 가방 끈을 당겼다.
그러자 가방 위에 올려져 있던 조끼랑 넥타이까지 떨어질 뻔 했다. 잠시만! 막 갈아입긴 했어도 더위 탓에 한두 개 풀어놓은 와이셔츠 단추 위에 억지로 넥타이를 맸다. 수동으로 된 학교 넥타이는 이 더위에 특히나 더 갑갑했다.
가자.겨우내 집을 챙기고 말했다. 학교에서 왼쪽으로 쭉 가면 나오는 횡단보도를 지나면 삼거리가 나오는데 주로 거기서 집 방향이 갈려서 헤어진다. 가끔은 일찍 돌아가는 게 싫어서 부러 이런 저런 핑계를 대 가며 육교 쪽을 거쳐 빙 돌아가기도 한다.
오늘은 뭐했어? 평소처럼 재미없었어! 심심해서 교장실에 종이눈을 잔뜩 뿌리고 왔지! 히나타는? 나는 그냥 얌전히 연습했는데ㅡ 전에 신입생에게 조금 장난친 후로 부장에게 된통 혼나서 당분간은 눈치 봐야 하거든. 뭘 했는데? 그냥 빈 사물함에 있던 물총으로 물총놀이? 도란도란 얘기를 하면서 걸음을 늦춰도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히나타 뭐해?”
“어, 아무것도 아냐. 잠깐만ㅡ”
어느 새 육교 앞이다. 오래 돼서 페인트칠이 벗겨진 육교는 난간 앞에 불법현수막들이 잔뜩 붙어 있다. 저건 신고도 안 하나. 발을 내딛으려 하는데 문득 떨어지지 않는 기묘한 감각에 나는 잠시 발쪽으로 시선을 붙였다. 그러나 그마저도 저를 부르는 그의 말에 황급히 뛰어감으로써 어쩐지 오늘 하루 내내 들었던 이상한 느낌에 대한 생각을 머리 밖으로 밀어 넣었다. 아까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무것도. 나는 고개를 흔들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일은 항상 예기치 않은 순간에 터졌다. 얘기를 나누면서 오가던 도중 그가 난간을 붙잡은 일순, 시선을 마주칠 틈도 없이 그것은 동시에 추락했다. 도로를 지나는 차량의 바퀴가 난데없이 콘크리트 바닥과 마찰을 일으키면서 듣기 싫은 소음을 냈고, 육교 위의 사람들은 난간에서 멀찍이 떨어진 새로 웅성대며 비명을 질렀다. 주변을 둘러싼 소음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제가 반사적으로 달려가려는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팔을 붙잡았다. 강한 악력이 뛰쳐나가려는 것을 막았고 그 상태로 정신을 잃었다.
* * *
“야, 이리에!”
톡톡, 누가 잠을 깨우는지 어깨를 흔든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왠지 익숙한 감각에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뜬다.
“다음 시간 이동수업이야.... 어, 야 아파?”
무슨 일 있어? 주번인 아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묻는다.
아니, 그냥 안 좋은 꿈이라도 꿨나봐. 식은땀이 흐른다. 그렇지만 나는 그것을 애써 외면한 채 어깨를 으쓱했다.
먼저 가 봐. 문은 내가 잠글게. 나는 불편해하는 주번에게 억지로 열쇠를 받아내고 문 너머로 밀어낸다. 힐끔 쳐다보는 아이에게 나는 모른 척,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알았어, 그럼 빨리 와. 할 수 없다고 여겼는지 그가 갔다. 꿈, 그래 꿈이지? 나는 흘긋 뒤를 돌아본다. 뭔가를 잊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게 뭔지는, 저도 알 수 없다.
히나타! 수돗가 앞에 앉아 꾸벅꾸벅 졸다가 그가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 카에데? 나는 작게 하품을 했다. 끝났어? 응, 방금 막. 나는 가방 끈을 세게 당기다 반사적으로 팔을 뻗었다. 하마터면 교복도 같이 떨어뜨릴 뻔 했다. 가방 위에 있던 넥타이를 아슬아슬하게 잡았다.
가자.
넥타이가 퍽이나 갑갑했지만 어영부영 챙겨 입고 나는 천천히 발걸음을 맞췄다. 교문을 지나 직진해서 조금만 위로 올라가면 육교가 나온다. 그때까지 걸리는 시간은 모르겠지만 주로 화제가 일상에서 다른 것으로 옮겨갈 즈음이다. 부러 걸음을 늦추면 한 10분 쯤 걸릴 거라 추측하고 있다.
그나저나 오늘 내내 들던 이상한 기분은 뭘까. 기억나지 않는 꿈과 잊을 만 하면 불쑥 떠오르게 만들던 데자뷰. 그러고 보니 나, 이상한 꿈을 꿨어. 나는 대화를 하다 문득 충동적으로 털어놓았다. 무슨 꿈인데? 그가 호기심을 비쳤다. 글쎄, 기억나진 않는데 굉장히ㅡ 응, 슬펐던 꿈인 것 같아. 나는 말끝을 흐렸다.
악몽이야? 그가 물었다. 나는 잘 모르겠어, 하고 말했다. 기억나지 않으면 중요하지 않은 게 아닐까. 그가 말했다. 그런데 오늘 어쩐지 내내-... 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기묘한 감각이 온몸을 휩쓴다. 나는 천천히 기억을 거슬러 간다.
“히나타 뭐해?”
앞서가던 카에데가 부른다.
어, 잠깐만ㅡ,
나는 초조하게 머리를 헤집었다. 나는 그의 팔을 붙잡았다. 잠시만, 나는 혼란스러움에 주변 시선에 상관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지금 당장 거울을 들이민다면 나는 굉장히 엉망지창인 얼굴이 되어있지 않을까. 불안함과 머릿속이 혼란스럽다. 꿈? 대체 어느 쪽이 꿈이야? 지금?
아니면 그가 죽은 것?
소름이 쫙 돌았다. 그 어떤 말로도 도무지 지금 심정을 표현할 수 없을 거란 확신이 든다. 희미하게 떠오르는 잔상은 잠깐이라도 정신을 놓으면 금방이라도 떠나갈 듯이 옅다. 손 안에 모래를 쥐고 있어도 이런 느낌은 안 들 거라는 생각이 숨 가쁜 와중에도 뱅글뱅글 돌아간다.
“가지 마.”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그저 입안에서 맴도는 말을 기어이 꺼내고야 말았다. 혀가 바짝 말랐다. 외면하고만 있던 현실이 어느 새 한 발짝도 안 되는 지척에 다가왔다. 온몸이 덜덜 떨렸다. 이를 악 물었다. 손이 미끄러워서 몇 번이나 다시 주먹을 쥐었다. 한여름은 후텁지근했고 내리쬐는 햇살은 너무 밝아서 눈물이 핑 돌았다.
만약 이게 꿈이라면 절대 깨어나지 않을래. 네가 죽는 현실 따윈 보기 싫어.
이러나저러나 매한가지였다. 바꾸려 해도 아무것도 바뀌질 않아. 보이지 않는 눈앞에 맥을 못 추자 그가 제 손을 잡았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평소처럼 웃으며 오히려 그렇게 말했다. 나는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깨물었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 모습마저 위태롭게 느껴지는 건 왤까. 마지막까지 걱정을 끼쳤을까. 더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다.
“좋아해.”
나는 억지로 눈물을 삼키고 담담하게 고백했다. 깔끔하고 담백했다. 그렇게 심했던 떨림도 어느새 멎었다. 나도. 사랑해. 그가 입꼬리를 말아 웃는다. 나는 천천히 그 앞에 다가가 손등, 머리카락, 팔, 그리고 마지막으로 입술에 키스했다. 서로 간지러워서 키득거리며 웃었다. 나는 반쯤 응어리진 눈물을 품은 채로 마주 웃었다. 그렇게 첫 키스는 아무런 감각도 없이 그저 이끌리는 대로 행동했다. 카에데. 문득 입을 열었다. 응? 나는, 네가 죽으면 따라 죽을 거야.
그 말에 카에데가 고개를 든다.
그러지 마. 왜? 그냥, 왜 히나타가 죽어? 그야, 카에데가 없으면 나도 못 살 거 같으니까.
이런 걸 가장 예상하지 못한 건 나다. 사랑 때문에 죽고 사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만큼 절절해 지게 된 나도 생각만큼 나쁘진 않았다. 사랑해. 연인들만의 언어를 속삭인다. 로맨틱한 분위기라곤 눈곱만큼도 없었지만 나는 그 때 이후로 그에게 두 번째 고백을 했다.
*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눈을 가리고 있던 팔을 걷으니 저를 잡은 남자가 구조원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있다.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나는 잠을 깨려는 듯 살살 뺨을 두드리다 테이프로 출입을 막아놓은 난간을 보았다.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아, 그래 저기서 추락사고가 일어났지. 누가 떨어졌더라. 나는 잠시 잠이 덜 깨 비틀거리다 중심을 서고 일어섰다. 뒤에 서 있던 사람들 중 누가 저를 발견했는지 어, 하고 소리를 냈다. 그가 무어라 말을 하기 전에 나는 비척비척 사고현장 앞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아까의 모습은 어땠는지 차만 통제해뒀을 뿐 그라든지 다른 건 없었다. 내가 고개를 빼꼼 내미는데 뒤를 보고 있던 경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난간에서 추락사한 금발 남자애 말인데- 저를 발견한 남자가 한 발 짝 더 다가왔고, 그리고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