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록
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반짝이는 전구와 종소리가 마주대며 춤을 췄다. 들뜬 분위기가 시린 바람을 타고 전해져왔다. 새하얀 입김이 꼭 구름 같았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였다.
하필 날을 잡아도 이런 날을 잡은 걸까. 부대끼는 걸 싫어하는 탓에 괜시리 찾아오는 후회를 막을 길이 없었다. 차라리 집에 있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빼곡 들 즈음 그 와중의 너는 살가운 그 모습 그대로 다가왔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그 어느 순간, 네가 크게 차지하고 있었다.
“약속 지키러. 내가 건물에 들어갈 순 없으니까. 그 때 꼭 날 비워 놔야해. 알았지?”
크리스마스도 바쁘댔고. 연말도 바쁠 텐데 괜찮을까. 날씨로 봐선 추울 것 같았지만 그런 생각도 할 겨를 없이 수락했다. 나와는 다른, 그냥 오랜만에 본 동갑내기의 아이가 좋아서, 그냥 그렇게 다음을 기약하고 싶어졌다.
-오는 도중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어! 시온씨가 마망이 됐다며?
그날은 좋은 날만은 아니었다. 그냥, 문득 올려다 본 하늘은 굉장히 화창한데 기분은 한없이 우울하고. 그 느낌이 너무 싫어서 면접을 마치고 나서는 내내 잠만 잤다. 핸드폰 진동소리 따윈 무시할래. 그냥 속이 매인 듯 갑갑했다. 한 번쯤 그런 날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기엔 너무 불편했던 날.
어느 시점인가 깨어났을 땐 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이렇게나 잤었나.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하며 폰을 여니 여간 소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처음만 했을 땐 그다지 좋지 않았는데, 그 떠들썩한 느낌이, 빠르게 돌아가는 사람들의 시간이 이전보다 그리 나쁘지만은 않게 보였다. 조용히 떠들썩한 움직임을 가만가만 보다 키보드를 꾹꾹 눌렀다.
결국 시온씨에게 허락 맡았다던 이야기 뒤로도 이야기는 툭툭 튀어나왔다. 영원한 열아홉이라고 말하는 네게 그럼 이젠 내가 형이 되네? 하고 짓궂게 물었다. 결국, 먼저 진 건 나였다.
“네가 영원히 열아홉이든, 나이를 먹든 계속 이대로 동갑하지 뭐.”
어차피 형이라고 불릴 생각도 없었다. 그냥 고민하는 네 모습이 좋아서. 너의 반응이 재미있어서. 그렇지만 끝까지 그러기엔 나는 너에게 약했다. 응! 동갑, 같은 나이. 친구! 그런 거지? 너는 그렇게 말했다. 친구라. 피식 웃음이 났다. 입안을 데구르르 맴도는 그 말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이리에는 어떤 하루였어?
그다음 이어진 대화에 뭐라고 답해야 할지 몰라서 잠시 머뭇거렸다. 처음에는 분명 피곤하다고 생각했는데 과연 정말로 그랬을까. 고민하다 설핏 웃었다. 그래, 마지막은, 꽤 즐거웠던 것 같기도.
“응, 그럴지도 모르겠다. 소네랑 대화하면 항상 재밌거든!”
동갑내기의 활발한 남자아이. 침착한 거랑은 거리가 멀지만 그런 성격이라 더 아무렇지도 않았던 건지도 모른다. 평상시엔 저보다 어려보이지만 종종 어른스러운 말을 하고, 같이 대화하고 있으면 편안해지는. 호감? 우정? 이런 걸 단순한 친구 사이라고 정의할 수 있어? 그렇지만 잠시간은 그렇게 있자. 그 이상의, 뭐라고 아직 한 마디로는 정의하지 못한 말을 다듬어 아직은 아니라고. 그냥 달콤하게 떨리고 자꾸만 즐거워지는, 그런 느낌의 사람으로만 남겨두자. 지금은 어떤 말로도 정의하지 못할 것 같아.
늘 상 달고다니는 상처에 너는 내게 동생 같다고 말했다. 그러나 네 입에서 나오는 동생이란 말에 왜인지 모르게 속이 탔다. 애기도 애도 아니야! 이건 정말로 별 거 아니고... 그리고. 어느새 변명하는 듯한 말투가 되어버린 것에 부루퉁해 졌다. 근데, 네게서 만큼은 동생이란 말은 어쩐지 듣고 싶지 않았다. 어쩐지 지금 기분이 그랬다. 바보 같지. 어리고 유치해보여. 그렇지만 누군가는 그게 당연한 거라고 했다.
“소네랑 얘기할 때만 이런 거야! 그다지 어리다는 소리는 안 듣는 편인데...”
그렇지만 이런 말을 했다간 정말로 어린애 취급을 당할 것 같아서 애써 감정을 숨긴 채 웅얼거렸다. 그렇지만 실제로 너랑 대화하면 그런 것 같아. 편하고 괜히 즐거워져. 싫다는 건 아니고. 그냥 뭔가 다른 사람이랑 대화하는 거랑은 조금 다른데... 여전히 그 불안감이 무슨 의미인지조차 모른 채 괜찮지 않음에도 괜찮은 척, 어른스러운 척.
지금 생각하면 그건 친구로는 남기 싫다는 간절하고 유치한 발악이었다.
-나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고마워!
이리에 멍청이. 하나도 괜찮지 않으면서.
* * *
원래 늦은 밤까지 깨어있는 일이 많았지만 요즘은 더 늘었다. 글쎄, 왜일까.
-밤늦게 오는 너를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서. 그냥 그 밖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이틀 뒤면 2014년이야. 휴대폰 한 구석의 시계를 보곤 문득 떠올렸다. 새해 첫날. 나는 그 때 누구와 같이 있게 될까. 어느새 화면 대기시간이 지나 까맣게 물든 폰을 빨려 들어갈 듯이 응시했다. 까만 화면에 누군가의 모습이 아른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음... 그, 미안! 하지만 그런 점이 좋다는 건 진짜고.. ”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툭 튀어나온 좋아한단 말. 언젠간 사고 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이런 타이밍은 아니잖아! 실은 지금도 머리가 뜨거워서 어질어질해질 것 같은 지경인데 어설픈 말 때문에 들키는 게 더 걱정. 괜찮아? 좋아해. 하고 싶은 말은 천진데 머릿속만 빙글빙글 어지러워. 이렇게 어설퍼도 될까? 걱정부터 앞서. 하지만 어떡해. 피할 수가 없었다. 그것은 가랑비였다. 나도 모르는 새에 옷깃을 적셨고 비를 맞았다.
-있지 이리에 오늘 몇 시에 자? 들키지 않았나?
어색하진 않았을까? 서툴기 짝이 없다. 그런데도. 그렇지만. 자꾸만 자꾸만 시선이 가는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아이스크림 사먹으러 가자는 네 말에 수긍하곤 두꺼운 외투를 챙겨 입었다. 어차피 시간도 남아돌고. 그러고 보니 지금 몇 시더라. 지금 문 연 가게가 있었나. 고민하면서도 외투에 손을 넣었다. 날이 제법 쌀쌀했다. 익숙한 듯 앞장서는 네 모습에 자주 가봤다던 얘기를 떠올렸다.
밤인데도 거리는 네온사인이 별 대신 반짝이고 정신이 멍할 만큼 어지러이 빛난다. 은은한 낙엽빛 조명. 뭐랄까, 보이진 않지만 지금 감정의 스위치가 굉장히 고조되는 것 같다.
카페에 들어오자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반겼다. 그리 요란스럽지는 않고 종소리가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 어서 오세요. 카운터 앞으로 가자 곧장 나오는 종업원의 목소리에 물었다. 뭐 먹고 싶은 거라도 있어? 메뉴판을 보며 말하자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젤라또 아이스크림! 맛은 아무거나. 아무거나라. 뭐가 좋을까. 고민하다 간단하게 오렌지 맛으로 두 개를 맞추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턱을 괴고 웃으며 얘기하는 네 모습에 작게 웃었다. 그러고 보니 2013년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어느새 지나가 버린 12시. 쌀쌀한 바람. 창 밖에 보이는 종과 반짝이는 조명들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작년처럼 고작 하루가 더 지나가는 것뿐인데도 1에서 2로, 앞자리 하나가 바뀌었다는 사실에 이리 들뜰 수 있다면 그 이유는 하나 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 해의 마지막. 그리고 새로운 한 해. 그냥, 그 곁에 네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 연애상담 들어줘야 되는 것 같은 느낌? 이리에는 있어?”
글쎄. 좋아하는 당사자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보면 뭐라고 해야 하는 걸까. 반대로 너는 좋아하는 사람 있냐고? 근데 그건 막상 생각은 하면서도 대답은 듣고 싶지 않다. 내가 아니란 말을 들으면 좋아한다는 말 한 마디조차 못하고 지워버릴 것 같아서. 아니면 눌러 놨던 게 펑! 하고 터지거나. 그래서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어떡해. 네가 다른 사람을 좋아한다는 사실보다 힘든 건 없는데. 그 말은 내게도 어떠한 선택권도 없었단 뜻이었다.
“있지. 좋아하고,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은 사람.”
심술처럼 장난스럽게 내뱉었다. 그러나 그 안에 든 말은 하나도 가볍지 않다. 좋아해. 좋아해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 사소한 일에도 괜히 마음이 쓰이고 어느새 자꾸 시선이 가는, 그런. 그런 말로 밖에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네가 말했다. 열렬한 거지?
열렬한 걸까, 이게?
응, 고민하다 그렇다고 답했다. 이걸 열렬하지 않다고 말하면 대체 무엇을 열렬하다고 말할 수 있느냐고. 달콤하게 떨리고. 긴장되고.
연애상담이라. 그러네. 지금 엄-청 떨려. 그렇지만 네가 말해줬잖아. 힘내? 파이팅? 좋아하는 사람에게 연애상담이라니. 누군가가 알았더라면 비겁하다고 비웃거나 사랑에 빠지면 겁쟁이가 된다는 흔한 말을 던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조금 색다르게 말하자면 네가 있어 고백할 수 있었다. 정작 듣고 싶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는 그만큼 지금 불안하고, 떨리고 있다고 생각해줘. 이런 걸 사랑하고 있다고 말하는 걸까?
하지만 이건 틀림없이 사랑이라고,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좋아한다 말할 수 있어? 흔하지만 쉽게 내뱉을 수 있을 만큼 가벼운 말은 아니야. 어쩌지, 지금 저질러? 사랑이라고 하기엔 여전히 낯간지럽고 어색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언제부턴지 모르게 좋아하게 됐어.”
오늘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 그래서- 잠시 말을 멈췄다. 떨렸다. 이건 결심이구나. 응, 정말로,
“이래보여도 진심이야.”
그냥 네가 아니면 안 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