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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일 로그

'Cherry blossom'

 

“벚꽃. 보러가지 않을래?”

 

새벽 공기가 차다. 오랜만에 일찍 잠에 깨서 멍한 정신으로 눈을 비비며. 낯선 봄의 흔적을 쫓는다. 마악 떠오르는 햇살은 따듯하기 그지없어 으슬으슬 찬 공기마저 데워지는 느낌이다.

주말에 별로 시간 내서 만난 적도 거의 없고. 내뱉고 나서야 깨달았는데, 이대로 일에 치여 흘러 보내기엔 너무나도 좋은 날씨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잠들려다가 본 새벽 정경에 눈이 팔려 어느새 창문을 밀어내고 만다.

끼익. 마른 플라스틱 소리가 통통 귓가를 두드린다. 서로 바쁜 시기여서 그런지 오랜만에 난 시간이었고 숨 가쁘도록 가쁘게 달려온 평일 뒤에 문득 본 창가는 만개한 목련과 흩날리는 벚꽃 잎으로 시야를 덮었다. 창문에는 마른 꽃잎이 하나 붙어있는데 떼서 놓으니 팔랑거리며 아래로 낙화했다. 푹 젖은 흙냄새와 봄의 향이 흠뻑 적신다.

벌써 봄이구나. 주룩주룩 내리는 비에 시선이 팔려 어느새 봄이 지척으로 다가온 줄도 모르고 있다 저 멀리 가시기 전에야 간신히 붙잡는다.

 

-오늘 같이 놀러 가지 않을래?

 

나는 등을 돌려 빙그레 웃었다. 잠시 방을 빠져 나온 새 잠에서 깬 건지 카에데는 벌써 일어났어? 라며 물었다.

좋아. 가자! 봄이 와르르 쏟아지는 느낌이다. 어, 대답하고는 창문을 닫고 부엌의 불을 켠다. 노란 불빛이 방 안에 반짝거린다. 먹을 것도 싸가자! 좋아, 먹고 싶은 거 있어? 방 밖은 햇살에 데워져 어슴푸레한 새벽이 말간 아침과 키스를 한다. 식기들이 달그락 거리며 몸을 부대꼈다.

가방 가져올게! 응, 다른 거 챙길 거 있어? 부엌은 금세 소란스럽게 변했다. 가끔 보면 사람보다도 더 영리하다고 생각하는 토끼, 캬라멜이 잠에서 깬 건지 불쑥 고개를 들었다. 점심쯤 되면 사람이 많이 몰릴 테니 얼른 준비해야 할 텐데도 잠깐 시선이 그리로 머물렀다. 마치 소란스럽다고 말하는 것 같아서 웃으며 미안, 하고 입모양으로 뻐끔거리자 토끼는 알아들은 것인지 냉큼 돌아간다. 가끔 저런 걸 보면 동물을 키우는 것도 딱히 나쁘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한다. 잘 챙겨줄 자신도 없고 혼자 지내는 걸로도 벅차니까 아예 고려도 안 하고 있었지만 같이 살아봐서 느는 건 정이고 새삼 느끼는 달가움이다.

방에서 제 이름을 불렀다. 히나타, 다 됐어? 아니, 아직. 나는 황급히 부엌으로 돌아갔다. 으아아, 할 게 많아서, 나는 잠시 고민하다 재료를 끄집어 온다. 벌써부터 누가 요리를 할 건지가 화두가 된다. 세 판의 가위바위보 끝에 간신히 이겨서 냄비를 붙잡았다.

아. 근데 뭘 만들 거였더라.

 

“미안해, 헷갈렸어.”

 

내가 말했다. 잠깐의 머뭇거림 후, 결국 요리는 그에게 맡기는 게 낫다는 판단 하에 나는 다른 일을 시작했다.(물론 이건 명백한 실수였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 한 번쯤 할 수 있잖아? 그게 오늘이었던 것뿐이야!) 가볍게 가방과 돗자리를 챙기고, 오히려 요리하는 게 시간이 더 걸려 그가 요리하는 걸 바라보다 후반부터는 나도 이것저것 도왔다.

 

“괜찮아! 그래도 다른 일 안 나서 다행이잖아!”

 

그가 경쾌하게 말했다.-어쩌면 천사는 지금 제 앞에 있는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다. 물론 그게 아니더라도 제게 그는 소중한 사람이었다.- 응, 역시 아무 일도 안 일어나서 다행이라고, 웃으며 말했다.

그러다가 잠시 한 바퀴 돌고 오니 시간은 벌써 점심때를 바라보고 있다. 예상했던 게 사람구경이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많은 사람들 틈에서도 나름 괜찮다는 생각이 들 때쯤, 나는 그를 붙잡고 조심스레 인파를 빠져나온다.

만발한 꽃들, 소란스러움의 중심지에서 조금 빠져나와 잡은 자리는 사람들이 뜸하게 오는 곳이었다. 4월의 일본은 온 전치가 벚꽃이고 봄을 제일 먼저 알리는 목련과 조화를 이룬다.“그러고 보니 히나타는 벚꽃 좋아해?”

그늘 아래서 그가 물었다. 나는 먹던 음식을 털어놓고 뒤늦게 예쁘긴 하지만, 싫어하는 것도 좋아하는 것도 아닌걸, 하고 말했다. 으음, 그럼 그냥 놀러? 응, 하고 나는 덧붙였다.

 

“요즘 많이 바빠서.”

 

만날 시간이 없으니까. 이렇게라도 보고 싶어서. 나는 뒤엣 말을 떠올리다 혀로 잠깐 그 말을 굴렸다. 보고 싶어서 그랬어. 도로록 굴릴 때마다 간지러운 소리가 난다.

 

“하긴 요새 많이 바빴으니까.”

 

그 역시 동감하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긴 무슨 일로 바쁜 건지 모르겠지만-예를 들어 그게 죽은 서류로 종이눈을 만든다든지 하는 일일수도 있었다-그쪽은 항상 바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조그맣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럼 나는 안 보고 싶었어?”

 

아니! 그가 말했다. 그는 곧장 부정하고는, 그럼 히나타는, 하고 제 의견을 물어본다. 나도, 보고 싶었어! 그 말을 내뱉기까지, 어쩐지 조금 쑥스러웠다. 나는 시선을 도시락 쪽으로 돌리며 애꿎은 식사만 젓가락으로 꾹꾹 눌렀다.

그것은 어쩌면 사실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거리는 꽤나 넓어서 한 바퀴만으로 꽤나 지친 건지 둘은 점심을 먹고 잠시 쉬려는 듯 정자 위에 누웠다. 그 과정에 있어, 제가 가지를 잡아 흔든다든지, 하여 꽃잎이 마악 날리는 불상사가 있긴 했지만. 어쨌든 마지막에는 둘 다 지쳐 제법 조용하게 있었다. 나는 다리를 쭉 뻗었다. 무릎 배게 해줄까? 응. 언제 깨워줘? 안 잘 거야―

 

앗, 하고 그가 말했다. 눈을 감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강한 바람이 넘실대어, 나는 가디건을 위에 걸쳐주었다. 추운 정도는 아니지만 주변이 날리어 불편할까봐 였다. 불어오는 바람을 보다 나는 공기에 말을 실었다.

 

“좋아해.”

 

봄바람이 쏴아아 불며 목소리를 집어삼킨다. 나는 그저 웃었다.

뭐라고 했어? 바람이 가고 그가 묻는다. 아무것도? 그게 뭐야! 하는 너의 목소리에도 나는 모르는 채로 일관했다.

 

“......어, 예쁘다.”

 

다시 한 번 바람이 불자 공기가 흔들흔들 춤을 추면서 진동을 한다. 꽃이 하늘을 향해 팔을 뻗으며 마악 손을 흔든다. 그러자 손 안에 움켜쥔 꽃잎이 흩날리면서 손은 기세 좋게 팡팡 꽃잎을 뿌려댄다. ――어쩐지 시선을 뗄 수가 없다. 멍하니 정신을 놓고 바라보다 문득 너를 돌아보고 깜짝 놀랐다. 나는 지금 당장 그에게로 가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나는 그리하는 대신 엄지로 손을 꾸욱 눌렀다 떼곤, 다음에 손을 뻗어 손바닥을 맞댔다.

코끝에 스치며 풀내음이 독했고 머릿속은 어지럽게 빙글빙글 도는 것 같다.

봄의 향기는 취해버릴 듯이 강렬했다. 앞에 달려오던 아이가 넘어지며 놓친 풍선이 하늘로 빨려 들어갔다. 자지러지게 우는 아이에게 그의 부모로 추정되는 남자가 다가와 아이의 손을 꼭 잡고 돌아섰다. 아이를 어르고 달래는 폼이 퍽 능숙해 보였던 남자는 곧 아이의 품에 풍선대신 웃음을 쥐어준다. 문득 속이 먹먹하였다.

 

“같이 걸을래?”

 

옆에서 그가 웃으며 말했다. 아마 그 역시 좀 전에 일어난 일련의 일들을 보지 않았을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 많으니까――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 대신 손을 풀고 편한 쪽으로 바꾸었다.

 

“좀 더 가면, 이 앞에 다리가 나온대.”

 

암묵적인 동의의 표시였다. 나는 일전에 들었던 것을 떠올렸다. 같이 보러 가자. 달갑게 웃었다. 햇살이 찬란하다.

 

같이 걷자고 한 다리 밑에는 유채꽃이 지천에 피어있다. 물은 투명해서 바닥까지 비춘다. 나는 손끝으로 다리의 난간을 더듬으며 걸음을 옮겼다. 부드럽진 않으나 조금 딱딱하고 나무의 감촉이 손끝까지 전해지는 다리 옆에서 달려드는 햇살을 만끽한다. 나른함이 물밀 듯이 밀려온다.

 

“기왕 온 거, 사진이라도 찍을래?”

 

일이 없으면 평소에는 거의 안 쓰기도 하고 대게 캬라멜을 찍을 때 쓰던 카메라를 들었다. 그냥 이 장면을 고정시킬 수 있다면, 하고 생각한 거기도 하지만 무언가 남길 수 있다는 건 썩 나쁘지 않은 일이다. 그게 추억이라든지 훗날 떠올릴 기억 같은 거라면 더더욱. 응, 누구에게 찍어달라고 하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앞에 있는 사람에게 부탁했다.

숫자 세는 소리가 들리고 이윽고 셔터음이 바삭거렸다. 어떻게 찍혔어? 사신을 건네받고 묻는다. 나는 받은 사진을 주었다.

봄이 달아나는 소리가 들렸다. 벚꽃이 질 때면 봄이 가는 탓일 테다. 나는 그것을 부러 붙잡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어쨌거나 봄은 다시 되돌아 올 거고. 그럼 그때는 그때답게 보내면 된다.

우리 다른 데 더 찍으러 갈래?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가자! 나는 그의 팔을 와락 붙잡았다. 살랑살랑 봄바람이 분다.

봄은 그렇게 먼 듯, 멀지 않은 듯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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