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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로 며칠이 지났을까. 내일 하루 종일 끌고 다닐 거란 말에 웃으면서 승낙했다. 원인은 기억하기 싫은 악몽 때문이었다. 그때 그 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 그렇게 죽어버린 탓에. 그 문장 자체에 담긴 미안함을 차마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니 그냥 탈탈 털고 잊어버려야지. 이젠 처음인 것도 아니잖아. 그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조금 속이 타들어갈 것 같지만, 그래도 꿈은 그냥 꿈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이 며칠이더라. 단말기를 훑다가 깔끔하게 쳐진 동그라미에 의문이 들었다. 무슨 날이 있었나? 생일도, 밸런타인데이도 지났고, 2월 19일이라고 쳐진 까만 동그라미라. 일정을 잘 기록해놓지 않는 성미에도 뭔가를 써놨다면 분명 뭐가 있을 텐데. 왠지 떠올리지 않으면 찝찝해질 것 같다. 눈치가 빠르진 않아도 둔하지 않는 편이다. 떠올리려고 애 써봐? 2월 19일이라면 앞으로 4일 후였다. 알바가 비는 날도 아니다. 곰곰이 생각하다 전화해 봤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소릴 들었다. 어쩌지, 다른 일정들을 살펴볼까 하는데 단말기가 울렸다.

 

-저, 이리에씨 전화 맞으세요?

 

이런 시대에도 여전히 이런 말로 말을 꺼내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다. 맞아. 매번 알면서 묻는 거, 귀찮지 않아? 비꼼이라기 보단 호기심이었다. 드문 것뿐만 아니라 이런 사람을, 화나게 했단 사람에 대해서도.

 

-습관인걸요. 이게 익숙해서 이젠 잘 바꾸지도 못하겠더라고요.

-응, 근데 무슨 일이야?

-다음 주에 본가 내려가기로 되어있거든요.

그래? 화해하게? 내뱉으면서도 그러지 않을 거란 왠지 모를 확신이 머릿속에 강하게 파고들었다.

-아니요, 다른 일 때문에요. 혹시 모르니까 알려주려고요. 실장님에게는 곧 말할 생각이에요.

-괜찮아?

-아니요, 이제 괜찮아 져야죠.

 

단호하기는. 그가 평소에 일 처리 하는 모습은 본 적 없지만 공적인 면에서 융통성이 없다는 말은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런 주제에, 평소에는 순하디 순한 녀석이면서도 딱 부러지는 면은 천성이라기 보단 과거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변한 부분이란 게 맞을까. 특정 사람들에게만 저러니. 그것보다. 단말기를 집어넣었다. 오랜만에 얼굴이라도 보러 갈까. 돌아갈 때 짐 챙기는 것도 도와줄 겸. 팔을 죽 폈다. 한가롭게 보내기엔 느지막한 오후시간은 제법 따듯하고 좋았다.

 

* * *

 

실망이네요, 이리에가 이런 걸 잊다니. 보이지 않는 그를 향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야, 너 말투 왠지 즐거워 보인다? 당황하는 게 재밌어?

네.

야.

뭐가요?

...콘도 솔직히 말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 거짓말이지? 나 놀리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냐?

 

설마요? 라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모습에서는 거짓을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쯤 조금 열 받아 있지 않을까. 물론 그게 여기까지 닿을 리는 없겠지만. 콘도는 느즈막히 시작했던 일을 겨우내 끝내고 단말기를 고쳐 든 다음 찻잎이 든 상자 뚜껑을 열었다. 물론 단말기 너머에 있을 그가 볼 리는 없었다.

즐거워 보인다는 말은 사실이었다. 그야, 오랜만에 보는 거잖아요, 이리에가 이런 모습 보이는 거. 그럼 같이 하면 되겠네요. 그렇게 되겠지. 콘도 꽃 좋아하지? 네, 잘 알죠. 좋아하니까요. 사랑 고백에 그만큼 자주 쓰이는 것도 없을 거다. 그래도 여전히 쓰이는 걸 보면 그만큼 지속적으로 사랑받는단 의미가 아닐까. 너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하고 그 사람의 내면에 말을 거는 의미로.

그러고 보니 그를 알게 된 지도 거의 1년이 지났다. 티스푼으로 두 세 스푼 뜨고 숟가락을 빙글빙글 돌리며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그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는 얘길 들었을 땐 많이도 놀랐다. 평소 마인드 자체가 지극히 즉흥적인 것도 있었고 아직은 뭔가 스스로 선택하기에 무리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스스로가 어른스럽다 생각해도 아직 어린 티가 여전히 지워지지 않은 사람. 그게 이리에에 대한 콘도의 평가였다.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 만도 않은가 봐요. 의외성은 그 사람에 대해 재평가를 하게 만든다. 평가? 아니, 이건 일종의 습관이었다. 좀 전 이리에가 말한 대로 집에서부터 이어져온 악습 같은. 어쨌거나 좋은 쪽으로 향하는 변화는 썩 나쁘지 않다. 그렇게 만든 건 소네씨일까- 어쩐지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졌다. 사회생활로는 선배라지만 사람들하고 어울리는 건 익숙하지 않아보였던 사람이었다. 저야 아직 누군가와 진심으로 이어갈 생각이 없지만 그런 건 조금, 아주 조금 부러웠다.

 

-어쨌든, 미리 축하 인사라도 해드려요?

-됐어, 내가 직접 말할 거야.

 

뚜뚜, 하는 신호음에 단말기 화면을 보자 까만 액정만이 반겼다. 너무 많이 놀렸나. 이런 건 보통 그의 역할이지만. 그렇지만 할 말은 이게 끝이 아닌 듯 곧이어 문자가 온다. [도와줘서 고마워.] 풋, 하고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정작 보고 싶은 사람은 자리를 비운 듯 해 보이지만. 점심 때니 도시락이라도 챙겨 먹으러 간 것 같다. 푸스스, 엷게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조금 편해진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 * *

 

-같이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래?

 

한산했다. 바쁜 시간대를 겨우내 넘기고 단말기를 고쳐 들었다. 괜찮아? 응, 괜찮아! 지금 어디야?

힐끔 고개를 들자 푸른 건물이 보인다. 낮에 하얀 가루처럼 흩날리던 눈을 기억해낸다. 어쩐지 조금 춥더라니. 작게 숨을 토해내자 크레파스를 뭉그러뜨려 그린 듯한 희미한 연기가 시야를 흐린다.

 

-셉터 앞인데- 카에데는?

-방금 일 마치고 기숙사. 응, 금방 내려갈게!

-응! 기다리고 있을게.

 

새삼 이랄까, 오랜만이랄까. 하얀 눈발 위에서의 기다림은 어쩐지 색다른 느낌이 난다. 괜히 멍하고 평소에 지나는 길이랑 느낌이 다르다. 저녁 먹기에는 시간도 지났고, 해서 결정한 것인데 왠지 처음으로 돌아간 것 같다.

그때도 좀, 추웠지. 겨울이라는 이름의 시계가 마악 4시를 지날 시점. -잊을 수 없는 날이었고 그럴 수도 없었다. 겨울에 아이스크림이라니-라고 했었나. 계절을 비껴나갔다지만 요즘은 그런 일 많잖아. 그런 걸 일일이 따지기엔 세상은 비정상적이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간다.

기다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왔다. 안 추워? 따듯하게 입고 왔어! 가게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산 후 천천히 공원을 거닐었다. 돌아갈 때쯤 시계를 보자 12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잠깐만. 그에게 작게 웃으며 말한 후 품에 껴안았다.

 

 

“있지,”

나랑 같이 살래?

 

섣부르진 않을까- 조금 고민도 해 봤는데 그래도 역시 전하고 싶었다. 네가 좋았다. 그 밖에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그렇다면 이걸로 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하게 해준다는 건 당연한 거잖아. 그럼, 너는 어때? 활짝 웃었다. 같이 행복해 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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